사라 그래도 사라, 그 이전의 사라

사라가 사라 온 이야기

The story of Sara
How Sara became the Sara we know now
이건 그냥 작은 이야기.

고목나무가 오뚝이가 되었다는 짧은 이야기.

네게는 스쳐지나가 버려도 생각나지 않을 남의 이야기.

하지만 사라 있는 내겐 너무 소중한 자취와 흔적으로 남을, 나의 이야기. 
나는 아주 오래된 고목에서 나고 자란 나뭇가지였어. 튼튼하고 단단한 가지들 중 하나였지. 
어느날 일꾼들에게 베여져 목공소로 오기 전까지는 말이야. 

품질 좋은 나무의 몸통은 금세 멋진 가구로 탈바꿈을 했어. 
하지만 일개 나뭇가지였던 나는 공장 창고로 옮겨졌지.
쉽게 버릴 만큼 작은 나무 조각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대단치도 않은 크기여서
공장 사람들은 내가 나무 더미에 있다는 사실조차 까맣게 잊고 말았어.

나는 목공소 한켠에서 아주 오랫동안 방치되었어. 
머리 위에 먼지가 켜켜이 쌓여 가고, 싱그러웠던 나뭇결은 하나 둘 시들어 갔지. 
하루하루 묵묵히 기다렸지만, 결국 가구가 될 기회는 오지 않았어.

공장 사람들은 결국 나를 분쇄기에 넣기로 결정해. 
낡고 오래된 나무토막은 그들에게 그다지 쓸모가 없었거든.
나무더미를 이루던 나무토막들은 하나 둘씩 분쇄기로 가는 레일 위를 걸어야 했어.
우리는 서로의 손을 꽉 잡았지만, 결국 놓아야만 했지.
거대하고 날카로운 칼날들은 굉음을 울렸고, 나의 친구들은 하나둘씩 맥없이 쓰러졌어.
가늘고 고운 가루가 되어 공기 속으로 스러졌어.

어느덧 나의 차례가 다가왔을 때, 나는 정신을 잃었어.
도저히 기계 안으로 들어갈 엄두가 나지 않았거든. 그 뾰족한 이빨들 사이로 말이야.
나는 이미 내가 죽었다고 생각했어.
그래서 다시 정신이 들었을 때, 얼굴 위로 흩어지는 햇살이 몹시 낯설었어.
따사로운 햇빛을 다시 보지 못할 거라 생각했거든.

나는 구해졌어.
손에 잡히는 묵직한 무게감이 마음에 들었던 작업자 하나가 나를 몰래 빼돌렸대.
그는 나를 자신의 작업장으로 데려갔어. 그리고 내 몸을 갈고 닦아 소소한 장난감으로 만들었지.
머릿속으로 오랫동안 그려만 오던 조그마한 나무 오뚝이를.

물론, 난 한참 기절해 있었으니까 이 부분은 기억에 없어.
내가 눈을 떴을 때 난 이미 오뚝이가 되어 버린 후였거든.
커다란 고목의 일부였던 나는, 그렇게 조그마한 나무 오뚝이로 다시 태어났어.


ㅡ • ㅡ 

오뚝이로 재탄생한 후에 나의 삶은 혼란의 연속이었어.
커다랗고 멋있는 고목으로 살다가 싹둑 베여 보잘것 없는 나무토막이 되고,
고풍스러운 가구가 되는 줄 알았는데 먼지 쌓인 폐기물이 되고,
죽을 고비를 거쳐 결국 소소한 놀이용 오뚝이로 탈바꿈한 나를
스스로가 받아들이기 너무 힘들었거든.

감사하게도 먼지가 되어 공기 중으로 사라질 운명은 피했지만
오뚝이가 되어 버린 후에

내가 누구인지 더 이상 알 수 없었어.

날 멋진 무언가로 만들어 주겠다는 이들은 자신들의 약속을 어겼고,
날 필요하다고 말한 이들은 날 버렸고,
날 쓰겠다던 이들은 날 잊었어.

나는 결국 그 누구에게도 가치 있는 존재가 아니었던 거야.

그 생각은 금세 나를 집어 삼켰어.
내 안에 머물렀던 중요한 조각 하나가 잘려 나간 기분이었지.
내 안의 일부를 상실한다는 건 말이야, 어떠한 형태로든 결코 좋은 경험이 될 수 없어.

그 후로 삶은 두려운 존재가 되었지.
나는 삶을 철썩같이 믿었는데
삶은 늘 나에게 서글프고 느닷없는 사건들만 안겨 주었거든.

두려운 존재와 매일 맞서야 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야.
그게 삶이라는 거대한 존재일 때는 더더욱.
나조차도 내 편이 되어 주지 못한 시간 속에서 내 안의 못된 생각들은 계속해서 자라났어.
일일이 다 풀어낼 수는 없지만 ( 그럼 너희들은 무서워서 도망쳐 버릴 걸? )
이거 하나만은 확실히 말할 수 있어. 생각들이 내 눈과 귀를 막았다는 것.

생각들은 속삭였어, 나를 설득했지.
'삶이 두려우면 꼭 맞서지 않아도 돼. 포기하는 걸 선택해 보는 건 어때?'

그건 꽤 매력적인 제안이었어. 참 바보같게도 말이야. 
무럭무럭 자라난 생각들은 금세 나를 집어삼켰어, 
그리고 어느 날,
나는 선반에서 몸을 던졌어.

내가 진열되어 있던 선반은 높고 가팔라서
성공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어.


ㅡ • ㅡ 


하지만 난 중요한 두 가지를 놓치고 있었지.
나는 나무로 만들어졌고, 오뚝이라는 사실을 말이야.
나무는 쉽게 깨지지 않아. 다만 금이 조금 갈 뿐.
오뚝이는 쉽게 넘어지지 않아. 다만 흔들릴 뿐.

선반에서 떨어진 후
단단한 나의 몸은 바닥을 박차고 여러 군데를 튀어 다녔어.
하지만 이내 동그란 몸통을 꼿꼿이 세우고 다시 일어서더라.
그러고는 좌우로 살랑살랑, 오뚝이답게 흔들거렸어.

무지 아팠어. 온몸이 욱신거렸지.
하지만 나는 여전히 사라 있었어.

아직도 살아 있다는 것.
그건 내게 굉장한 울림이었어.

나는 내가 살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지 않았거든.

지나가던 작업자의 눈에 띄어 다시 선반으로 돌아올 때까지
나는 생각을 하고 또 했어. 아마 며칠 밤낮을 꼬박 지새웠을 거야.

이번에는 생각들이 내게 속삭이지 않았어.
내가 직접 내게 속삭였지.
그건 아마도 내가 처음으로 만들어낸 나만의 목소리였을 거야.
목소리는 내게 이렇게 말했어.
나는 내 생각보다 더 강한 존재였는지 몰라.
그걸 나만 모르고 있었는지도 몰라.
봐, 저 높은 선반에서 떨어졌는데도 이렇게 꼿꼿이 서 있잖아.
나는 생각만큼 약한 존재가 아니야.

생각해 봐.

삶을 포기하는 게 선택이라면
삶을 사는 것도 선택이었는데
왜 그걸 몰랐을까?

선택지는 언제나 두 갈래였어.
나는 바보같게도 그 중 하나만 있다고 생각했지만.


ㅡ • ㅡ 


그 날 이후 나는 삶을 사라 보기로 선택했어.
전적으로 내가 결정한, 나의 온전한 선택이야.

삶은 두려워. 그건 변하지 않는 사실이야.
가끔 성미가 고약해지기도 해서, 예상치 못한 무언가를 우리 얼굴에 던져 버리기도 하지.
하지만 이제 나는 삼이라는 친구와 진지하게 알아 가는 시간을 가져 볼 거야.
인생에서 가장 오래 된 이 친구가 어떤 아이인지 궁금해졌거든.

왜 그토록 심통이 났는지, 매번 투정만 부리는지.
혹시 너무 외로웠던 건 아닌지,
내가 그랬던 것처럼
삼도 스스로 방치되어 왔다고 생각한 건 아닌지.
그래서 홀로 무척 아팠던 건 아닌지.
궁금해졌어.

삼과 나는 아직도 서로를 알아 가는 중이야.
낯을 가리기도 하고, 간혹 어색해지기도 하지.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해.
삼은 내가 보호하고 아껴줘야 할 작고 소중한 존재라는 것.
당연히 버려져도 되는 가벼운 대상이 아니라는 것.

가끔은 씁쓸한 투정도 부리고, 예민하게 굴기도 하지만,
그가 전하는 씁쓸함과 예민함이 결국 내게 필요한 자양분이었다는 걸,
이제는 알아.


그래서 나는 오늘도 용감하게 사라 있지.
그리고 앞으로도 사라 갈 거야.

당장 내일 나의 세상이 또 어떻게 변할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사라 볼래.
하나뿐인 삶이니까.

내 삶이니까.



2022.08.06. 사라 씀. written by Sara.